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정종 2년(1400, 庚辰) 1월 28일(甲午) 정종실록 3권 3번째 기사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을 토산(兎山)에 추방하였다.
방의(芳毅)ㆍ방간과 정안공(靖安公)은 모두 임금의 동복 아우였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으니 마땅히 후사(後嗣)가 될 터인데, 익안공(益安公)은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근신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고 방간은 자기가 차례로서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배우지 못하여 광망하고 어리석었으며 정안공은 영예(英睿)하고 숙성(夙成)하며 경서(經書)와 이치에 통달하여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귀부(歸附)하였다.
방간이 깊이 꺼리어서 처질(妻姪) 판교서 감사(判校書監事) 이내(李來)에게 말하기를, “정안공이 나를 시기하고 있으니 어찌 필부(匹夫)처럼 남의 손에 개죽음을 하겠는가?”하니 이내가 깜짝 놀라 말하였다.
“공(公)이 소인의 참소를 듣고 골육(骨肉)을 해치고자 하니 어찌 차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정안공은 왕실(王室)에 큰 훈로가 있습니다. 개국과 정사가 누구의 힘입니까? 공(公)의 부귀(富貴)도 또한 그 때문입니다. 공이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대악(大惡)의 이름을 얻을 것이고 일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방간이 불끈 성을 내어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를 도울 사람이면 말이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는 방간의 처의 양부(養父)인데, 꿇어앉아서 손을 비비며 말하기를, “공은 왜 이런 말을 하십니까?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하였다.
“이내는 우현보(禹玄寶)의 문생(門生)이었으므로, 우현보의 집에가서 말을 자세히 하고 방간이 이달 그믐날에 거사(擧事)하려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 “정안공 또한 공의 문생이니 빨리 비밀히 일러야 합니다.”하였다.
우현보가 그 아들 우홍부(禹洪富)를 시켜 정안공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정안공이 하륜(河崙)ㆍ이무(李茂) 등과 더불어 응변(應變)할 계책을 비밀히 의논하였다. 이 앞서 방간이 다른 음모를 꾸며 가지고 정안공을 그의 집으로 청하였는데, 정안공이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가지 못하였다. 다른 날 방간이 정안공과 더불어 함께 대궐에 나가 임금을 뵙고 말(馬)을 나란히 하여 돌아오는데, 방간이 한 번도 같이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삼군부(三軍府)에서 여러 공후(公侯)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햐여 둑제(대가나 군중의 앞에 세우는 둑기에 지내던 제사)에 쓰게 하였다.
정안공이 다음 날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먼저 조영무(趙英茂)를 시켜 몰이꾼(구군, 驅軍)을 거느리고 새벽에 들에 나가게 하였다. 방간의 아들 의령군(義寧君) 이맹종(李孟宗)이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와서 사냥하는 곳을 묻고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오늘 또한 사냥을 나갑니다”하므로 정안공이 사람을 방간의 집에 보내어 그 사냥하는 곳을 정탐하였는데, 방간의 군사는 모두 갑옷을 입고 분주히 모였었다. 정안공이 이에 변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때에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ㆍ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 10인이 모두 정안공의 집에 모이었다.
정안공이 군사로 스스로 호위(扈衛)하고 나가지 않으려 하니 이화와 이천우가 곧 침실로 들어가 군사를 내어 대응할 것을 극력 청하였다. 정안공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거절하기를, “골육(骨肉)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것이다. 내가 무슨 얼굴로 응전하겠는가?”하였다.
이화와 이천우 등이 울며 청하여 마지않았으나 또한 따르지 아니하고 곧 사람을 방간에게 보내어 대의(大義)로 이르고 감정을 풀고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방간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어찌 다시 돌이킬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화가 정안공에게 사뢰기를, “방간의 흉험한 것이 이미 극진하여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작은 절조를 지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으나 정안공이 오히려 굳이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화가 정안공을 힘껏 끌어 외청(外廳)으로 나왔다.
정안공이 부득이 종 소근(小斤, 몸종:小史)을 불러 갑옷을 내어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정안공이 이에 나오니 이화ㆍ이천우 등이 껴안아서 말에 오르게 하였다. 정안공이 예조전서(禮曹典書) 신극례(辛克禮)를 시켜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궐문을 단단히 지켜 비상(非常)에 대비하도록 명 하심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믿지 않았다.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하였다.
이문화가 이르기 전에 방간이 이미 인친(姻親) 민원공(閔原功)ㆍ기사(騎士) 이성기(李成奇) 등의 부추김을 받아 이맹종과 휘하 수백 인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태상전(太上殿)을 지나다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하였다.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하였다.
방간이 군사를 행(行)하여 내성(內城) 동대문(東大門)으로 향하였다. 이문화가 선죽교(善竹橋)가에서 만나 “교지(敎旨)가 있다”하니 방간이 말에서 내렸다.
이문화가 교지를 전하니 방간이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서 군사들을 가조가(可祚街)에 포진하였다.
정안공이 노한(盧閈)을 시켜 익안공에게 고하기를, “형은 병들었으니 청하건대 군사를 엄하게 하여 스스로 호위하고 움직이지 마십시오.”하고 또 이웅(李膺)을 시켜 내성(內城) 동대문을 닫았다. 승지(承旨) 이숙번(李叔蕃)이 정안공을 따라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가다가 백금반가(白金反街)에 이르렀는데, 민무구(閔無咎)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빨리 병갑(兵甲)을 갖추고 오라”하였다. 이숙번이 이에 달려서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갔으나 그가 이르기 전에 정안공이 이미 군사를 정돈하여 나와 시반교(屎反橋)를 지나 말을 멈추고 여러 군사들이 달려와 말 앞에 모여서 거리를 막고 행(行)하지 않았다.
이숙번이 군사들로 하여금 각각 본패(本牌)에 돌아가게 하여 부오(部伍)가 정해지니 정안공에게 고하기를, “제가 먼저 적(敵)에게 나가겠습니다. 맹세코 패하여 달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은 빨리 오십시오.”하고 무사(武士) 두어 사람을 거느리고 먼저 달 려갔다.
정안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한 곳에 모여 있다가 저쪽에서 만일 쏘면 한 화살도 헛되게 나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일찍이 석전(石戰)을 보니 갑자기 한두 사람이 작은 옆 골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오니까 적들이 모두 놀라서 무너졌었다.
지금 작은 골목의 복병(伏兵)이 심히 두려운 것이다”하고 이지란(李之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활동(闊洞)으로 들어가 남산(南山)을 타고 행(行)하여 태묘(太廟) 동구(洞口)에 이르게 하고 이화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산에 오르게 하고 또 파자반(把子反)ㆍ주을정(注乙井)ㆍ묘각(妙覺) 등 여러 골목에 모두 군사를 보내어 방비하였다.
이숙번이 선죽(善竹) 노상(路上)에 이르니 한규(韓珪)ㆍ 김우(金宇) 등이 탄 말이 화살에 맞아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숙번이 한규에게 이르기를, “네 말이 죽게 되었으니 곧 바꿔 타라”하고 김우에게 이르기를, “네 말은 상하지 않았으니 빨리 되돌아가서 싸우라!”하고 이숙번이 달려서 양군(兩軍) 사이로 들어가니 서귀룡(徐貴龍)이 또한 먼저 들어가서 이숙번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한곳에 서서 쏩시다.”하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이런 때는 이름을 부르는게 아니다. 나는 내(川) 가운데 서서 쏘겠다.”하였다. 정안공이 한규에게 말을 주어 도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임금이 또 대장군(大將軍) 이지실(李之實)을 보내어 방간에게 일러 중지하게 하려 하였으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방간이 선죽(善竹)으로부터 가조가에 이르러 군사를 멈추고 양군이 교전하였는데, 방간의 보졸(步卒) 40여 인은 마정동(馬井洞) 안에 서고 기병 20여 인은 전목동구(典牧洞口)에서 나왔다.
정안공의 휘하 목인해(睦仁海)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김법생(金法生)이 화살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에 방간의 군사가 다투어 이숙번을 쏘았다. 이숙번이 10여 살을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양군(兩軍)이 서로 대치하였다.
임금은 방간이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말을 듣고 더욱 노하고 또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방간이 비록 광패(狂悖)하나 그 본심이 아니다. 반드시 간인(奸人)에게 매수된 것이다. 골육(骨肉)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하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이 아뢰기를, “교서(敎書)를 내려 달래면 풀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곧 하륜에게 명하여 교서를 짓게 하였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자리하여 종실(宗室)ㆍ훈구(勳舊) 대소 신하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함에 힘입어서 태평에 이를까 하였더니 뜻밖에 동복아우 회안공 방간이 무뢰(無賴)한 무리의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에 유혹되어 골육을 해치기를 꾀하니 내가 심히 애통하게 여긴다. 다만 양쪽을 온전하게 하여 종사를 편안하게 하려 하니 방간이 곧 군사를 놓아 해산하고 사제(私第)로 돌아가면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식언(食言)하지 않기를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한다. 그 한 줄의 군사라도 교지를 내린 뒤에 곧 해산하지 않는 자들은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울러 군법으로 처단하겠다.” 좌승지(左承旨) 정구(鄭矩)에게 명하여 교서를 가지고 군전(軍前)에 가게하였는데, 이르기 전에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가 소속인 경상도(慶尙道) 시위군(侍衛軍)을 거느리고 검동원(黔洞源)을 거쳐 묘련점(妙蓮岾)을 통과하였다.
정안공이 검동 앞길에 군사를 머무르고 자주 사람을 시켜 전구(前驅)를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 형을 보거든 화살을 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하였다. 이화 등은 남산(南山)에 오르고, 이저는 묘련점(妙蓮岾) 응달에 이르러 함께 각(角)을 불었다. 숙번이 기사(騎士) 한 사람을 쏘아 맞혔는데, 시위 소리에 응하여 거꾸러지니, 곧 방간의 조아(爪牙) 이성기(李成奇)였다. 이맹종은 본래 활을 잘 쏘았는데, 이날은 활을 당기어도 잘 벌어지지 않아서 능히 쏘지 못하였다.
대군(大軍)이 각(角)을 부니, 방간의 군사가 모두 무너져 달아났다. 서익(徐益)ㆍ마천목(馬天牧)ㆍ이유(李柔) 등이 선봉(先鋒)이 되어 쫒으니 방간의 군사 세 사람이 창을 잡고 한 데 서있었다. 마천목이 두 사람을 쳐 죽이고 또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정안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들은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하였다. 서익이 창을 잡고 방간을 쫒으니 방간이 형세가 궁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정안공이 소근을 불러 말하기를, “무지(無知)한 사람이 혹 형(兄)을 해칠까 두렵다. 네가 빨리 달려가서 소리쳐 해치지 말게 하라”하였다. 소근이 고신부(高臣傅)ㆍ이광득(李光得)ㆍ권희달(權希達) 등과 더불어 말을 달려 쫒으니 방간이 혼자서 달려 묘련(妙蓮) 북동(北洞)으로 들어갔다. 소근 등이 미처 보지 못하고 곧장 달려 성균관(成均館)을 지났다. 탄현문(炭峴門)으로부터 오는 자를 만나서 물으니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소근이 도로 달려 보국(輔國) 서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방간이 묘련 북동에서 마전(麻前) 갈림길로 나와서 보국동(輔國洞)으로 들어가는데, 안장을 띤 작은 유마(騮馬)가 뒤따라갔다. 소근 등이 뒤 쫒으니 방간이 보국 북점(北岾)을 지나 성균관 서동(西洞)으로 들어서서 예전 적경원(積慶園) 터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고 활과 화살을 버리고 누웠다. 권희달 등이 쫒아 이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죽이러 오는구나!”하니, 권희달 등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은 두려워하지 마시오.”하였다.
이에 방간이 갑옷을 고신부에게 주고 궁시(弓矢)를 권희달에게 주고 환도(環刀)를 이광득에게 주고 소근에게 말하기를, “내가 더 가진 물건이 없기 때문에 네게는 줄 것이 없구나. 내가 살아만 나면 뒤에 반드시 후하게 갚겠다.”하였다. 권희달 등이 방간을 부축하여 작은 유마에 태우고 옹위하여 성균관 문 바깥 동봉(東峯)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방간이 울며 권희달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말을 들어서 이 지경이 되었다”하였다. 정구(鄭矩)가 이르러 교서(敎書)를 펴서 읽고 방간의 품속에 넣어주니, 방간이 절하고 말하였다.
“주상의 지극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신은 처음부터 불궤(不軌)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정안(靖安)을 원망한 것뿐입니다. 지금 교서가 이와 같으니 주상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여생(餘生)을 빕니다.”
이때에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정안공 집의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서 스스로 제 집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반드시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공과 함께 죽으려 하여 걸어서 가니 시녀 김씨(金氏) 등 다섯 사람이 만류하였으나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김씨(金氏)는 곧 경녕군(慶寧君)의 어머니이다〗종 한기(韓奇) 등이 길을 가로 막아서 그만두게 하였다. 처음에 난이 바야흐로 일어날 즈음에 이화와 이천우가 정안공을 붙들어서 말에 오르게 하니 부인이 무녀(巫女) 추비방(鞦轡房)ㆍ유방(鍮房) 등을 불러 승부를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하였다.
이웃에 정사파(淨祀婆)라는 자가 사는데, 그 이름은 가야지(加也之)이다. 역시 그가 왔기에 부인이 이르기를, “어제 밤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新敎)의 옛집에 있다가 보니 태양(太陽)이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莫同)이〖금상(今上)의 아이 때의 휘(諱) 충녕대군:세종대왕〗해 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니 정사파가 말하기를, “공(公)이 마땅히 왕이 되어서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한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하니, 정사파는 마침내 제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사파가 이겼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고하니 부인이 그제 서야 돌아왔다.
정안공이 군사를 거두어 마전(麻前) 갈림길의 냇가 언덕 위에 말을 멈추고 소리를 놓아 크게 우니, 대소 군사가 모두 울었다. 정안공이 이숙번을 불러 말하기를, “형의 성품이 본래 우직하므로 내가 생각하건대 반드시 남의 말에 혹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으리라 여겼더니 과연 그렇다. 네가 가서 형을 보고 난(亂)의 이유를 물어보라”하였다.
이숙번이 달려가서 방간에게 물으니 방간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숙번이 다시 묻기를, “공이 이미 권희달에게 말을 하고서 왜 말을 하지 않습니까? 공이 만일 말하지 않으면 국가에서 반드시 물을 것인데, 끝내 숨길 수 있겠습니까?”하니 방간이 부득이 대답하였다. “지난해 동지(冬至)에 박포(朴苞)가 내 집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의 큰비[大雨]에 대해 공은 그 응험을 아는가? 예전 사람이 이르기를,「겨울비가 도(道)를 손상하면 군대가 저자에서 교전한다」하였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 같은 때에 어찌 군사가 교전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공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써야 할 것이다’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공연히 타인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하여 이에 먼저 군사를 발한 것이다”하였다. 이숙번이 돌아와서 고하니 정안공이 드디어 저사(邸舍)로 돌아갔다.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이숙(李淑)을 보내어 가서 방간에게 이르기를, “네가 백주(白晝)에 서울에서 군사를 움직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골육지정(骨肉至情)으로 차마 주살(誅殺)을 가하지 못하니 너의 소원에 따라서 외방에 안치(安置)하겠다.” 방간이 토산(兎山) 촌장(村庄)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호군(大護軍) 김중보(金重寶), 순군 천호(巡軍千戶) 한규에게 명하여 방간 부자를 압령(押領)해서 토산에 안치하게 하였다.
박포는 본래 정안공의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였는데, 그날 병을 칭탁하여 나오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변을 관망하고 있었으나 명하여 순군옥(巡軍獄)에 내리고 또 방간의 도진무(都鎭撫) 최용소(崔龍蘇)와 조전 절제사 이옥(李沃)ㆍ장담(張湛)ㆍ박만(朴蔓) 등 10여 인을 가두었다.
그때에 익안공은 오랜 병으로 인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변을 듣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위에는 밝은 임금이 있고 아래에는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방간이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였는가?”하고 곧 절제(節制)의 인(印)과 군적(軍籍)을 삼군부(三軍府)에 도로 바쳤다.
이 앞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아뢰기를, “어제 어두울 때에 붉은 요기(妖氣)가 서북쪽에 보였으니 종실(宗室)가운데서 마땅히 맹장(猛將)이 나올 것입니다”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정안공을 지목하였는데, 8일 만에 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