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Ⅰ
가정대부 호조전서 대광봉익대부 문하시중 진현전대제학 만포공
嘉靖大夫 戶曹典書 大匡奉翊大夫 門下侍中 進賢殿大提學 晩圃公
전서공(생, 몰년 미상)께서는 고려 말기 문신으로 호는 만포(晩圃) 휘(諱)는 영비(英庇)이시다.
시조(始祖)이신 온양군(溫陽君) 휘 우(佑)의 12세손이시며 려말(麗末)의 유학자(儒學者)로 성균좨주(成均祭酒)와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역임한 문희공(文僖公) 백운(白雲) 우탁(禹倬: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의 사위이시다.
할아버지는 정순대부 방예빈시사추밀원지사(正順大夫 邦禮賓寺事樞蜜院知事) 휘 진(振)이시고 아버지는 봉익대부 판전객시사(奉翊大夫判典客寺事) 휘 양익(良益)이시며 어머니는 아쉽게도 전래하는 기록이 없다.
희천(熙川)의 토호(土豪)로서 가정대부 호조전서(嘉靖大 夫戶曹典書) 강계진관 방어유수 (江界鎭管防禦 留守)를 지내고 대광봉익대부문하시중(大匡奉翊大夫 門下侍 中) 진현전대제학(進賢殿大提學)에 이르셨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따르면 문장(文章)이 일세를 진동했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조를 부흥시켜 보려고 충절을 다하다가 고려의 운이 다하자 경덕궁(敬德宮) 앞 고개(부조현, 不朝峴) 북쪽에 관(冠)을 걸어놓고 고석산(古石山)에 들어가 벼슬하지 않으셨으며, 두문동 72학자사건(杜門洞七十二學者事件)의 일원(一員)이시다.
한시(漢詩) 해안가(海雁歌:기러기 노래)를 지으셨다.
정배(正配)는 정부인 단양우씨(貞夫人丹陽禹氏)이시며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나신 분이 바로 중조(中祖)이신 좌명공신 희천군(熙川君)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 양정공 (襄靖公) 휘 우(宇)이시다.
묘(墓)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77-5(산45-5번지) 홍복산(弘福山) 서변(西邊)에 있는 서산(西山) 유좌지원(酉坐之原)에 모셨다. 그러나 배위(配位)의 묘소는 실전(失傳)되었다.
【註】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山)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72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 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崇仰)되었고, 두문동 태학생(太學生) 72인이 라고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