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공 묘갈(執義公墓碣)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80-2
집의 김공 규 묘지명
執義 金公 戣 墓誌銘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 사헌부집의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김공 묘지명 병서 통정대부 행 광주목사 신응시(申應時) 짓고 통덕랑 전 행 아산현감 김현성(金玄成) 글 씀
나의 벗 집의 경엄 김규는 장단과 연안부사로 출보 되었다가 파주목사를 거쳐 정주목사로 옮긴 다음해인 1580년(선조13) 3월에 병으로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마쳤다.
아! 공의 재능과 현명함으로서 벼슬은 여기에서 그쳤고 그리고 또한 그렇게 장수하지 못했는가!
공은 태어나면서부터매우 영특하여 어렸을 때에 이미 글을 얽어서 지었 데, 일찍이 선공(先公)을 모시고 의주에 있을 때 중국 사신 왕학(王鶴)이 여러 사람 가운데서 한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시(詩)를 지어 준 것에 ‘모름지기 많은 서적을 읽도록 하라 '[須讀五車書]’는 귀절이 있었다.
1548년(명종3)에 부친상을 당해 장례와 제례를 예경(禮經)을 따라 하였고 복제(服制)를 마치고 난 후 1552년(명종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장옥(場屋:시험장)에 들어 학문의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나이는 30세가 못되었으나 사람들은 능력을 지니고도 쓰이지 못한다 하였다. 처음에 감역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왕자(中宗의 王子 海安君)의 사위이기 때문에 예에 따라 제수되는 것이요 그의 뜻은 아니었다. 1562년(명종17)에 평강현감(平康縣監)이 되었는데, 어버이를 위해서 뜻을 굽히고 나간 것이다.
1564년(명종19)에 비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적에 제수되었고 곧 사간원정언에 발탁 되었다가 천거로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헌부지평승에 승진하였고, 조금 뒤 헌납으로 옳겼다. 융경(隆慶:명나라 목종 때의 연호) 정묘(丁卯, 1567년, 명종22)에 병조정랑에서 장령으로 승진하였는데, 2년 뒤인 1569년(선조2)에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가 부교리와 교리가 되어 거의 20여 차례 출입하였다. 또한 집의와 사간에 승진하였고, 대체로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을 거치는 외에 낭관(郎官)을 지낸 것이 다섯 차례이니, 호조·예조·병조·형조와 공조 등이고, 정(正)이 되기도 역시 다섯 차례이니 말한다면 종부시·예빈시·사복시·군자감과 내섬시이다. 사유(師儒)가 되어 직강·사예·사성이 된 것도 한 두 차례가 아니었다.
공의 천성이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수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병조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군기(軍機)와 정체된 사무를 살피어 다스리니 늙은 아전들도 모두 그의 명석함에 감복하였다. 대간이 되어서는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권세 있는 자를 꺼리지 않았으며 왕을 모시고 경연(經筵)을 열 때에는 상고하여 조사하기를 상세히 하여 아주 적절하게 하였다. 이러므로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음이 많아 의외의 비방까지 당하였으나 시의(時議)의 수용한 바는 되지 않았다.
모부인(母夫人)을 위하여 여러 번 외직에 보임되어 봉양함을 구하여 모친을 봉양함이 지극하였고 또한 힘써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함을 부공(父公)같이 하였으며 나머지는 배우는 자들을 모집하여 가르치면서 자못 침식을 잊었고 내외를 위해 그가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않았으니 역시 숭상할 만하다 하겠다. 평생을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만여 권의 책을 사들였고 잠시도 손에서 떼지 아니하니 해박한 기문(記聞)은 동배들이 미칠 수 없는 바였다.
1577년(선조10) 겨울에 우통례로서 국장도감의 도청(都廳:우두머리)이 되었는데, 일을 마치고 상자(賞資)를 받는 것이 전례였으나 어느 일에 연루되어 파직됨으로써 실행되지 못하였고 겨우 오십의 나이에 목사에서 생을 마쳤으니, 어찌 명(命)이 아니겠는가! 5대조 휘 우(宇)는 태종조에 좌명공신에 책록되었고 희천군(熙川君)에 봉(封)해졌으며 벼슬은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고조 휘 유지(有智)는 승습(承襲)하여 희천군에 봉해졌고 증조 휘 인문(仁門)은 신창현감이며, 조(祖) 희 총(聰)은 결성현감이고, 고(考) 휘 백순(伯醇)은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참차관 · 춘추관이며 어머니 변씨는 선전관 몽정(夢程)의 여식으로서 지금도 건강하게 내단에 계시다.
공이 해안군(海安君)의 가문에 장가들었으니 곧 중종(中宗)의 손녀이다. 불행히 자녀가 없어 종형(從兄) 전(戩)의 아들 유영(攸寧, 개명하여 휘 준두<遵阧>)으로 후사를 삼았다. 뒤에 측실에서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의 이른은 경룡(慶龍)이고 장녀는 종실의 창령을 맞았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나 응시(應時)는 공과 더불어 20세 이전부터 같이 유학하며 한 자리에서 지냈으므로 형제와 같이 두터운 정의(情誼)는 오랜 동방(同榜:동시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 친구일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무덤에 가기 전 수일 전에 서산(西山)에 가서 곡을 할 때에 공의 자형 금화(金化) 신익(申瀷)이 명(銘)을 부탁하니, 어찌 나만큼 공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글을 할 줄 모른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성민차근(性敏且勤) 성품은 영민하고 또 부지런하며
자단이공(資端而恭) 자질은 단정하고 공손하였네.
유문유행(有文有行) 문학이 있고 행위가 있는데다
역기조봉(亦旣遭逢) 또한 임금의 신임도 받았었는데
반도견지(半途見躓) 중간에 좌절(挫折)이 있었고
연우중절(年又中折) 나이 또한 중간에 꺾이니
시야명야(時耶命耶) 시운(時運)인가 천명(天命)인가
장통욕절(長慟欲絶) 길게 통곡하니 절명(絶命)하려 하네.
1581년(선조 14, 辛巳) 명, 만력 9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