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충신 부조현언지록
유명 조선국 태조 원년 홍무 25년(중국 명나라 연호) 임신 가을 7월 재생백(16일) 을미일은 곧 고려의 운이 다하고 본조(本朝)가 천명을 받은 때이다.
충신과 열사의 무리들이 이에 “신복(臣僕)이 될 뜻은 없고 스스로 그 의(義)를 다스림에 마땅함을 다할 바라”고 하고 모두 송도(松都:지금의 개성)의 저자 동남쪽의 언덕에 올라 조천관(朝天冠)을 걸어 놓고 폐양(蔽陽)의 삿갓을 쓰고 곧 남쪽을 바라보며 조현(朝峴)하지 않는다고 각자 그 뜻을 말하였다.
조의생(趙義生)이 말하기를, “나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만족하니 죽음이 있을 뿐이요. 그리고 후사(後事)는 없다.”고 하니 임선미(林先味)와 고천상(高天祥)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그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전귀생(田貴生)이 말하기를, “깊은 산에 들어가 농사짓는 자를 누가 알리요”라고 하였다. 이숭인(李崇仁)이 말하기를, 도하(陶河:요순의 세상을 비유함)의 세상은 아! 이미 멀어졌도다.”라고 하였다. 이맹예(李孟藝)는 말하기를, “뇌수산(雷首山ㆍ首陽山)에서 청풍에 씻기를 원한다”고 하였고 우현보(禹玄寶)는 말하기를, “나라를 버린 계찰(季札:춘춘추시대 오나라의 왕자)을 죽도록 본받겠다”고 하였으며 조승숙(趙承肅)은 말하기를, 백이(伯夷)의 굶어 죽음이 나의 뜻이다”라고 하였고 채귀하(蔡貴河)는 말하기를, “동쪽의 송도를바라보니, 다시는 우리의 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박심(朴諶)이 말하기를, “원컨대 고려산(高麗山)을 찾노라”고 하였고 신안(申晏)은 말하기를, “차마 두 임금을 섬기는 신하는 되지 못하겠노라”고 하였으며 김충한(金忠漢)은 말하기를, “원컨대 고향의 전리(田里)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였고 서중보(徐中輔)는 말하기를,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두 송도를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떤 사람인데 일찍이 서산(西山)에서 굶어 죽었는가?”하고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버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때에 정몽주(鄭夢周)는 이미 선죽교에서 순국하였고 길재(吉再)는 먼저 가버렸으며 이수인(李守仁)ㆍ정희량(鄭熙良)ㆍ김진양(金震陽)ㆍ이종학(李種學) 등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고 유순(柳珣)은 오봉산에 숨었으며 우현보는 중국으로 최양(崔瀁)은 중대산에 들어갔으며 조승숙은 덕곡에 숨었고 전오륜(全五倫)은 서운산에 들어갔으며 김자수(金自粹)는 추령에 숨었고 남을진(南乙珍)은 고사천에 변숙(邊肅)은 압천에 김영비(金英庇)는 희천에 조안향(趙安鄕)은 천산에 숨었고 이행(李行)은 예천에 들어갔으며 신안은 황의산으로 돌아갔고 서견(徐甄)은 금양에 숨었으며 임탁(林卓)은 금성으로 돌아갔고 이양중(李瀁中)은 광릉으로 들어갔으며 고천우(高天佑)ㆍ변귀수(邊貴守)ㆍ김준(金埈)ㆍ윤규(尹珪)ㆍ이수인 등의 무리는 멀리 암혈(巖穴)의 사이로 도망가서 그 의리를 취하고 그 인(仁)을 이루었다.
당시 사대부가 다 그 도(道)를 고상하게 여겨 그것을 바라는 자는 오직 그에 미치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다.
고려의 신하 45인의 현자(賢者)는 성명이 전하지 않고 또한 8인은 먼저 그 처자(妻子)를 죽이고 섶을 쌓아 놓고 스스로 불을 질렀으니 이러한 일은 모두 요속(謠俗)에서 연유한 것이니 전해야 할 성명은 갖추지 못하였다.
그 당시 절개를 온전히 한 사람으로 길야은(吉冶隱)ㆍ차운암(車雲巖) 같은 이 외에 민보문(閔普文)ㆍ채귀하ㆍ성사재(成思齋) 같은 사람은 모두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고, 도망간 자와 이름을 숨긴 자와 순절한 자가 몇 사람에 그치지 않으니 오늘날 가히 상고할 수가 없다.
■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조선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인의 고려(高麗) 유신( 遺臣을) 이르는 말.
72인의 이름이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ㆍ신혼(申琿)ㆍ신우(申祐)ㆍ조의생ㆍ임선미ㆍ이경(李瓊)ㆍ맹호성(孟好誠)ㆍ고천상ㆍ성사제ㆍ박문수(朴門壽)ㆍ민안부(閔安富)ㆍ김충한∙ 이기(李倚) ∙ 배문우(裵文祐)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고 한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72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 유래 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節義)의 표상(表象)으로 숭앙되었고, 杜門洞學生 72인이라고도 불렀다.
太祖는 고려 유신들을 회유(懷柔)하기 위하여 경덕궁(敬德宮)에서 친히 과장(科場)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應試)를 하지 않고 경덕궁 앞 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 다. 그리고 부조현 북쪽에 관(冠)을 걸어 놓고 넘어 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렀다 한다.
1740년(영조 16) 英祖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현의 이러한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그 뒤 이 고사(故事)가 임선미∙조의생 자손의 가승(家乘)을 통하여 正祖에게 알려져 1783 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