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천김씨의 세계(世系)
상계도(上系圖)
시조(始祖)~12世
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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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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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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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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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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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희천김씨의 세계는 시조 휘 우(佑)로부터 12세 휘 영비(英庇) 선조까지는 관향을 온양(溫陽)으로 삼아 오다가 13세 휘 우(宇)에 이르러 추충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희천군(熙川君)에 봉(封)해져 후대에 휘 우를 중조(中祖)로 받들고 관향을 희천으로 삼아 개관된 관계로 대동기미보(大同己未譜)를 간행할 때 중조이신 양정공(襄靖公) 휘 우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 간행한 을사보서(乙巳譜序)에 따르면 우리 김문(金門)은 이에 신라로부터 두루 성조(聖朝)에 미침이 해를 세어보면 일천 일백여 년에 세전(世傳)은 6~70대(代)가 된다. 오늘의 훈예(勳裔)와 옛 왕손의 자손은 창성한 것이니, 누가 모든 가문의 정수(丁數)와 세벌(世閥)의 훈혁(燻爀)함을 알아서 또 동방의 갑족(甲族)이라고 하랴! 이는 우리 희천김문(熙川金門)만 전하지 못하는 말이니, 실제로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통하여 아는 일이다.
왕적(王績)은 신라의 역사에 밝게 전하고, 공훈의 이름은 맹부(盟府)의 철권(鐵卷)에 훤히 기재되어 있으니, 명문(名門)과 화벌(華閥)을 누가 이에서 더 하랴! 이는 다시 시조에서 모아진 원기가 여음(餘蔭)에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모든 종족도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영체(零替)함이 심한 것인가! 팔로(八路)에 흩어져 살면서 관향을 모독하여 두 개의 관향을 쓰니, 온양(溫陽)이라 하고 혹은 희천(熙川)이라 한다. 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한 아! 구보(舊譜)에 어찌하여 시조의 내역이 기재되어 있지 않는가! 여러번 병화(兵火)를 거치면서 가승(家乘)을 잃어서인가!
서문을 쓰려하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이에 감히 동사(東史)를 채집하고 비조(鼻祖) 이십팔세(二十八世)의 연원을 낱낱이 들어서 수편(首篇)에 소상히 기재하였고 그 단서를 이어서 연하여 기록하였으니, 곧 시조 휘(諱) 알지(閼智)는 김씨의 비조가 되었고 그리고 뒤로 전하여 7세손 휘 미추(味鄒)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의 선위(禪位)를 받았다. 라고 서술하였다.
어찌 됐든 우리의 관향이 선 (先) 온양이고 후(後) 희천인 것은 분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