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천김씨의 주요 세거지와 집성촌
주요 세거지
대동보(大同譜) 기록에 따르면, 중조(中祖) 휘 우(宇) 이래로 수도(首都) 한성(漢城)과 양주(楊州) 등 경기 지방에 세거하였다. 그러다가 5세손 휘 백순(伯醇)의 친제(親弟) 휘 중순(仲醇)의 대(代)를 전후하여 일부가 전북 완주의 상관면으로 옮겨 갔다. 관향인 희천(熙川)에는 4세손 휘 일진(日進)의 자손들이 거주했다.
8세손 휘 엄(渰)의 후계가 부평(지금의 부천)에 자리 잡았고, 10세손 휘 윤(鈗)의 후계가 경기도 이천(利川) 율현(栗峴)으로 친제인 휘 경(鏡)의 후계가 전북 김제(金堤)와 완주(完州) 반교(盤橋)로 옮겨 갔고, 휘 중순(仲醇)의 후계 휘 일(鎰) 이래로 전주(全州)ㆍ김제ㆍ진안(鎭安)에 자리 잡았고 휘 감(鑑) 이래로 정읍(井邑) 이평(梨坪)에 정착한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훗날 집성촌을 이루었다. 또한 휘 희윤(希尹)은 임란(壬亂) 당시 희천으로 피난 낙향하여 많은 자손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휘 희열(希說)의 후계가 경북 봉화(奉化)에, 휘 희증(希曾)의 후계가 강원도 홍천(洪川)에, 휘 충남(忠男)의 후계가 황해도 장연(長淵)에, 휘 언남(彦男)의 후계가 송화(松禾)에, 휘 천우(天佑)의 후계가 봉산(鳳山)에 자리 잡았다.
대체로 10세손의 대로부터 약 2대에 걸쳐 여러 자손들이 남북 각지로 옮겨 갔다. 그 후 11세손 휘 광국(光國) 후계가 황해도 해주(海州)로 휘 애현(愛賢) 이래로 평북 강계(江界) 땅으로 옮겨갔다.
또한 정읍에 정착하였던 13세손 휘 귀수(貴秀)의 후계가 순창(淳昌) 쌍치(雙置)로 옮겨가 이들 지역에 오랫동안 세거하였다.
집성촌
노령(蘆嶺)을 배경으로 내장산(內藏山), 칠보산(七寶山) 등 큼직한 산악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냇가와 들판이 한데 어울렸으니, 이곳이 바로 전북 정읍시 이평면(梨坪面), 희천김씨 약 40여 호가 모여 살았던 집성촌이다.
조선시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초대 현감을 지냈고 동학혁명(東學革命)의 총수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이 바로 이곳 고부(古阜) 출신으로 여기서 역사적인 민권 봉기를 하여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유서 깊은 고을이기에 이 지방 시민들은 누구나 향토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여 향토의식이 강하면서도 일찍이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눈을 뜬 탓인지 비교적 배타성은 희박하며 개성적이면서 강직한 성품이 이 지역민의 특징이다.
이곳에는 조선 영조(英祖) 때에 양정공(襄靖公) 중조(中祖)의 13세손 휘 운기(運奇)의 손자 휘 연성(鍊性) 이래로 정읍 이평면 오금(梧琴) 각목(角木)마을에 휘 연기(璉奇)의 손자 휘 만중(萬重) 이래로 각목과 약 1km 정도 떨어진 양지(良池) 마을에 정착하여 지금도 많은 종인(宗人)이 고향을 지키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또한 장파문중(長派門中)의 10세손 휘 윤(鈗)의 후계가 경기도 이천 율현(栗峴) 마을에 자리 잡으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그 고장에서는 일명 ‘밤고개 김씨’라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