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주군 묘갈(威州君墓碣)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80-2
우부승지 김공 백순 묘갈명
右副承旨 金公 伯醇 墓碣銘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김공 묘갈명 병서 정헌대부지중추부사 겸 지연경연사 홍문관제학 정사룡(鄭士龍) 짓고 통훈대부 여성위 송인(宋寅) 글 씀
사망한 벗 김공 백순씨가 죽고 소상이 지났는데, 그 아들 규가 서장을 보내어 선인의 행적을 모았으니, 비문을 지어주길 청하므로 나는 차마 사양하 질 못하고 이에 그의 세계(世系)를 차례대로 넣기를 되풀이 하였다.
상고하면, 공의 출신은 위성(威城 )에 적을 두었으니, 비조 휘 영비(英庇)는 관직이 검교한성윤에 이르렀고 이가 양정공 휘 우(宇)를 낳았는데, 그는 좌명공신에 녹훈(錄勳)되고 희천군(熙川君)에 봉해졌으며 휘 유지(有智)는 품계가 가선으로 희천군에 습봉(襲封)되었고 휘 인문(仁門)은 신창현감 이니, 승정원 도승지에 증직되었으며, 휘 총(聰)은 결성현감이니, 덕원부사 이회의 가문에 장가들었다. 홍치(弘治 : 중국 명나라 효종 때의 연호) 갑인(甲寅, 성종25, 1494년)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함이 보통이 아니었고 번거롭게 권유하지 않아도 학문이 일취월장하였으며, 나이 약관이 안 되어 이미 부모를 잃었다. 또한 할머니의 상을 당하여 세 차례의 상사를 치름에 있어 장례와 제사가 예절에 맞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성균관을 거쳐 갈옷을 벗고 승문원정자에 보임되었고, 예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가 대교로 승진 하였는데, 서반에 서용되어 3년을 머무르다가 곧 함경평사에 임명되어 병사의 막료(幕僚)로 있으면서 기민하다고 칭찬 받으면서 조정으로 들어와서 예조자랑이되었다가 조금 지나 경상도사에 제수되었는데, 임기가 차자 내직으로 공조정랑에 임명되어 춘추관의 직책을 겸임하였고, 호조정랑으로 옳겼는데, 교서관교리을 겸임하였다.
수원부의 호칭을 강등하여 수원군으로 되면서 이관(貳官 : 府使)을 혁파하여 줄였으므로 사무가 군수에 집중되었는데, 조정에서 공을 추천하여 여군수로 삼자, 적체된 일을 나누어 처리하니 그 명성과 소문이 파다하였다. 공은 스스로 여러 유생을 위하여 경전을 강론한 것이 상당히 정밀하였으 므로, 학관들이 그를 크게 소중하게 여겼는데, 마침 사유를 선임하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어 공이 첫번째로 피선 되어 다시 성균관사예에 제수 되었다가 사성에 올랐으며 또 사도시성에 승진되었다가 사복시정으로 옮겼다.
평안도의 한 길이 변방과 연접하여 우역(郵驛)의 관할에 있어 반드시 청렴하고 명망있는 자를 선임하여 보임하였는데, 공이 이로서 나가서 대동찰방이되어 오래 묵은 폐단을 바로 잡으니 우역의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말하였다. 인산진은 협강을 사이에 두고 백성들이 교통하고 화물을 무역하는 길을 제어하였는데, 공은 다시 여러 사람의 천거를 받고 발탁되어 절충장군의 품계를 더하여 첨사를 삼자 금령(禁令)을 간략하고 엄숙하게 하니, 간사한 백성들이 갑자기 그쳤다.
공은 방비하는 여가에 변방 백성들의 자제 가운데 학업에 뜻을둔 자들을 모아서 경전과 사서를 가르치니, 빛나는 성과를 거두어서 학문에 불만한 자도 있었다. 또 다섯 번의 고과(考課)를 거치자 의주의 절제사가 결원이었으므로 전보되어 의주목(義州牧)에 임명되었다. 의주는 중국과 접하고 오랑케를 대비하면서도 민사가 지극히 번잡하여 한 도의 중심이 되는 땅이었으므로 공은 힘을 다하여 중국 사신을 응접하고 사안에 따라서 준비하고 통치하였다.
공은 나머지 시간에 빈객과 막료들을 맞아들여 활쏘기를 겨루거나 시를 읊으며 술을 나누기를 아침이 되기까지 하였으면서도 일찍이 피곤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공은 대동찰방에서 세 번 전보 되어 의주목사가 되기까지 앞뒤 기간이 6년이었는데, 옥관(玉關 : 중국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국경을 지칭)에 너무 오래 엄체되었다는 탄식을 마땅히 조정에 보고할 만한데도 도리어 본인은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처럼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자기 시체를 싸서 고향에 돌아가 묻히겠다는 뜻을 다짐하였다.
마침내 임기가 만료되어 불러서 돌아오자, 즉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우부승지로 나아갔다. 공은 오랫동안 서북 변방에 있으면서 왼쪽 어깨에 종기가 나는 통중을 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사직하기를 간청하니 여러번 휴가를 주시어 조리하면서 치료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어서 임시로 산질(散秩)이 되어 의원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이듬해 1548년(명종3) 설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춘추는 55세였다. 그해 2월 계유(癸酉)일에 양주 서산(西山)에 있는 선영에 묘역에 장사 지냈다.
공의 처음 배위는 민씨이니 승지 원(㥳)의 여식이며 후사가 없었고, 계실 변씨는 선전관 몽정(夢程)의 여식으로 1남 2녀를 낳았다. 1남은 규(戣)이고, 서출로 두 아들을 낳았으니 감(戡)과 집(戢)이다. 규는 종실(宗室)의 해안군(海安君) 희(㟓)의 여식에 장가들었다. 장녀는 이의로(李義老)를 맞이하였고 차녀는 신익(申翼)을 맞이하였다. 나는 공과 같은 일을했으나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감히 명(銘)을 붙인다.
재석문무(在昔文武) 옛적에는 문무의 직분을
임총일신(任摠一身) 한사람이 다 맡았는데
기이위이(岐而爲二) 지금은 갈라져서 둘이 되었으니
고소전인(故少全人)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이 적다네.
공유문사(公由文事) 공은 문관의 사무를 거쳤는데
시전무략(試展武略) 무략을 시험적으로 펼쳤네.
금중파목(禁中頗牧) 궁궐 안에서는 조나라의 명장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이요
불수위곽(不數衛霍) 한나라의 위청(衛靑)과 곽거병(藿去病)임을 헤아리지 못했네.
공극사지(公克似之) 공은 지극히 그들과 닮아서
무적불의(無適不宜) 가는 곳마다 적의하지 않음이 없었네.
재석좌부(纔釋左符) 겨우 부신(符信)을 내놓자마자
입전후사(入典喉司) 들어가 후사(承政院)를 맡았었지
만리수공(萬里收功) 만리에서 공을 거둬들임은
방속외기(方屬外寄) 바야흐로 외방의 소임에 부쳐서이네.
생약유위(生若有爲) 태어난다는 것은 할 일이 있는 것과 같은데
탈지하극(奪之何亟) 그것을 빼앗은 것은 어찌 그리 빠른가!
기축불식(其畜不食) 그는 가축을 먹지 않았으니
이유우후(以裕于後) 후대에 넉넉함을 주려는 때문이네.
아명불상(我銘不爽) 나의 명(銘)이 시원하지 않은 것은
용질유구(用質悠久) 유구한 훗날에 질문하려는 것이네.
명종 4년(1549, 己酉) 명, 가정 28년 10월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