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공 신도비(兵使公神道碑)
전북 완주군 상관면 마치리 산57
훈련대장 매곡 김공 준계 신도비명
訓鍊大將 梅谷 金公 遵階 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행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겸 북청도호부사 김 공 신도비명 병서 여주목사 양극선(梁克善) 짓고 유학 류연(柳演) 글 씀
공(公)의 휘는 준계(遵階)이고 자는 언승(彦昇)이니, 위성(威城)의 대족(大族)이다.
추충 익대좌명공신 병조판서 휘 우(宇)이며 시호 양정공(襄靖公)의 후손이다.
공에서부터 도령중랑장 휘 복태(福泰)에 이르기까지 상계(上繼)가 십여 세(十餘世)인데, 관면이 끊이지 않았다.
고(考)의 휘는 전(戩)이니, 숭정대부로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이시고, 조(祖)는 휘 중순(仲醇)이니, 호조참의이며, 증조는 휘 총(聰)이니 결성현감 · 통례원좌통례이다. 이상 3대는 공 때문에 귀하게 되었다.
비(妣) 정경부인 김씨 또한 광산(光山)의 망족으로 봉력대부 성균관전척 주정(周鼎)의 여식이다. 가정(嘉靖:명나라 세종 때의 연호) 갑인(甲寅, 1554년, 명종9) 2월 조6일에 공을 곤지(坤止)에서 낳았으니, 어려서부터 대장부의 뜻이 있었다.
만력(萬曆:명나라 신종 때의 연호) 계미(癸未, 1583년, 선조 16)에 호방(虎榜:武科)에 올라 연이어 내삼청(內三廳)에 제수되었다. 부경사(赴京使) 이상(二相:左贊成) 최황(崔滉)이 데리고 갈 것을 계청(啓請)하고 즉시 돌아와 그 아들 유원(有源)에게 일러 말하기를, 일행은 황(滉)을 당물로 취하게 하지 않음이 있으되 김모는 유독 주지 않으니, 향기 나는 가지에서 과실을 본 것이다. 내 마음에 스스로 공경함이 생기니 너도 그를 공경하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의 청렴함에 감복한 것이었다.
1590년(선조 23)에 하동(河東)에 제수되고 1594년(선조 27)에 영암(靈巖)에 제수되었으며, 1596년(선조 29)에 밀양(密陽)에 제수되고, 1597년(선조30)에 대구(大邱)에 제수되었다. 모상(母喪)을 당해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돌아왔고, 1598년(선조31)에 기복(起服)하여 훈련원정이 되었다. 때에 순천(順天)에 제수되었는데, 당장(唐將) 유종병(劉摠兵)이 선택하기를 청하거늘, “감히 죽을지언정 병사는 선봉에 선다”고 하니, 비변사에서 공을 천거하여 장수로 삼았으나,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고도 보호하지를 못하였다. 10월에 곧 순천부사에 제수되었는데, 문무를 번갈아 천거함에 공이 명령을 받고 통정(通政)에 제수된 것이었다. 1603년(선조36)에 경기수사에 제수되었다. 한 명의 관원이 의(義)가 아닌 것을 다투었는데, 공은 흔들리지 않았으니, 이 말을 들은 자는 경탄하였다.
1605년(선조38)에 충청병사에 제수되었고 1607년(선조40)에 간성(杆城)에 제수되었으며, 1608년(선조41)에 철원(鐵原)에 이배(移拜)되었으니, 모두 조방장을 겸직한 것이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황해병사(黃海兵使)에 제수되었고, 1610년에 다시 호서절도사에 제수되었는데, 청백함을 스스로 힘쓰고, 전후를 한결 같이 하니, 유민이 다시 모여들었다.
1611년에 온성(穩城)에 제수되었다가 회령(會寧)으로 이배되어 가선(嘉善)에 올랐고, 군량과 병기를 수선하는 일로 가의(嘉義)에 올랐으며, 성상(聖上)을 호위한 공으로 자헌(資憲)에 올랐다.
1618년(광해군10)에 동지중추부사 훈련대장에 제수되었고 1619년에 남도병사(南道兵使)에 제수되었는데, 척완(戚婉 : 임금의 외척)의 재신이 군정을 무시하거늘 공이 분연히 열무하면서 그 하사(下使)를, 명(命)을 사용하지 않고 베니, 도내(道內)가 저상(沮喪 : 기가 꺽이다)하였다.
1622년(광해군14) 봄에 해직되어 본가로 돌아와서 거문고와 학(鶴)과 화훼로 자오(自娛)하였으니, 풍진(風塵)속의 외인(外人)이었다. 집은 심히 청빈하으나 누공(屢空)함을 생각하지 않았고 손님이 오면 번번이 취하게 하고 파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5월 8일에 병이 들어 정침에서 종명하니, 천명이었다.
수(壽)는 70이었으며 이해 7월에 정수지동(淨水之洞)의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에 장사를 지냈으니, 이명(理命:정신이 맑을 때 자식에게 남김 유언)을 따른 것이다.
.
공은 천분(天分)이 심히 아름다웠으니, 부모에 효도하고 아우에게 우애했으며, 남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무겁고 엄하고 굳세어서 세속을 따라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향리에 사는 착한 자는 좋아 하였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권귀(權貴)한 자를 거스름이 많았으니, 염근(廉謹)함으로 자신을 지켰다.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으니 보는 자가 아름답다 하였다.
정부인은 국성(國姓)으로 중종대왕의 셋째 아들 해안군(海安君) 희(㟓)의 여식이나 비록 귀한 신분을 생각하지 않았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낙(洛)이고 차남은 형(浻)이며, 여(女)는 수사 이담(李憺)을 맞이하였다. 측실은 정실에게 공손하였다.
3년을 지난 1625년(인조3) 봄에 공의 생질 원외랑 유응원(柳應元)의 서신이 나에게 이르렀는데, 말하기를, '나의 외삼촌은 평생 동안 남을 좋게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대가 묘갈(墓碣)을 이미 남들에게 제공한 것 같이 원하건대, 일언을 빌어서 무덤을 꾸몄으면 합니다.' 라고 하므로 나는 이미 거듭 유(柳)의 청함이 있고 또한 평소 부러움을 느낀 지가 오래되어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졸렬한 문장으로서 삼가 그 만(萬)에 하나를 쓴다.
오호(鳴呼) 아!
천추만세(千秋萬歲) 천추만세에
금천종정(金天種精) 금천에 정수(精髓) 모으고
화악강신(華岳降神) 화악(삼각산)에 신이 내렸으니
생불우이(生不遇爾) 살아서는 그대 만나지 못했네.
흉반육도(胸蟠六鞱) 가슴에는 육도 서리고
사천칠찰(射穿七札) 활쏘기는 칠찰(일곱층의 갑옷미늘)을 꿰뚫는 기량이었네.
재공여사(再公餘事) 공의 남은 일 있으니
요장수월(腰章手鉞) 허리엔 인장(印章)이요, 손엔 부월(斧鉞)이었네.
위륭심비(位隆心卑) 지위는 높은데, 마음은 낮추었으니
가여한사(家如寒士) 집이 가난한 선비와 같네.
격선경양(擊鮮罄養) 생선을 잡아 봉양을 다하고
추영급천(追榮及泉) 영화를 밀어 황천에까지 미쳤네.
자도비지(子道備至) 자식의 도리 지극함을 갖추고
애독천륜(愛篤天倫) 사랑하여 천륜을 두텁게 했네.
안유후곤(安遺後昆) 편안함 후손에 끼쳐
가법진미(家法盡美) 가법이 아름답네.
직이이행(直已以行) 곧게 이미 행함으로서
득정이폐(得正而斃) 바름을 얻고 돌아갔네.
애영종시(愛榮終始) 시종(始終) 몹시 영화로웠으니
장단무인(將壇無人) 장단에 이만한 사람 없네.
향리핍현(鄕里乏賢) 향리에 현자(賢者)없으니
금수앙지(今誰仰止) 오늘은 누굴 우러를까
극인읍혈(棘人泣血) 상주(喪主)가 피눈물을 흘림은
효사불궤(孝思不匱) 효도를 다하지 못함이네.
생자여차(生子如此) 이와 같은 아들을 낳았으니
산왈사자(山曰獅子) 산은 일러 사자라 하고
동호정수(洞號淨水) 골(谷)이름 정수라 하네.
정신완재(精神宛在) 정신은 완연히 남아있으니
아최기적(我最其迹) 나는 그 자취를 모아
수영우석(垂映于石) 석비(石碑)에 드리워 비춘다네.
여주 목사 양극선 짓고, 유학 류연 글 씀
추기(追記)
이는 곧 목사 양극선(梁克善)공이 찬(撰)항 훈련대장 매곡(梅谷) 김준계(金遵階)공의 비명(碑銘)이다. 비문을 한지 370년 만에 모든 후손들이 협력하여 묘도에 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추기를 부탁하였다. 대개 공은 임진(壬辰) 난리에 현감(縣監)으로서 한산도에서 이충무공(李忠武公)을 따라 죽을 힘을 다 해서 혈전(血戰)을 하여 삼품(三品)에 오르고 선무원종훈 일등에 책록되었으며 1612년(광해군4)에 회령부사(會寧府使)로서 훈로(勳勞)가 있어서 한 자급(資級)을 더하라는 교서가 있었다. 또한 한음(漢陰 : 이덕형, 李德馨), 월사(月沙 : 이정귀, 李廷龜), 만취(晩翠 : 권율, 權慄), 선원(仙源,김상金尙容),묵재(默齋 : 이귀, 李貴), 수몽(守夢 : 정엽, 鄭曄), 동강(東岡 : 李恒福) 등 제공으로 더불어 위성원 종훈에 참여하여 부조지전의 지극함을 입었다. 장남 낙(洛)은 부사(府使)가 되었고, 차남 형(浻)은 정랑(正郞)이 되었으니, 이는 다 원문에 미치지 못한 바이다. 이에 실록과 녹권(錄券) 등단록(登壇錄)과 청선고(淸選攷) 등 모든 문헌에 의지하여 삼가 우(右) 와 같이 기술한다.
황주 변시연 근기
단기 4328년(1995)을해 2월 고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