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Ⅱ
중조 태종조 추충익대좌명공신 희천군 자헌대부 병조판서 양정공
中祖 太宗朝 推忠翊戴佐命功臣 熙川君 資憲大夫 兵曹判書 襄靖公
중조(中祖) 양정공(1354∼1418년)께서는 조선 전기 무신으로 초휘(初諱)는 도길(都吉), 호는 안락헌(顔樂軒), 휘 는 우(宇)이시다.
1354년(공민왕 3, 甲午) 2월 5일 시조(始祖) 온양군 휘 우(佑)의 13세손으로 태어나셨으며 할아버지는 봉익대부 판전객시사(奉翊大夫判典客寺事) 휘 양익(良益)이시고 아버지는 가정대부 호조전서(嘉靖大夫戶曹典書)를 지내고 대광봉익대부 문하시중(大匡奉翊大夫門下侍中) 진현전대제학(進賢殿大提學) 에 이르신 희천(熙川)의 토호(土豪) 강계만호(江界萬戶) 휘 영비(諱英庇)이시며 어머니는 정부인 단양우씨(貞夫人丹陽禹氏)로 려말(麗末)의 명신 역동선생 문희공(文僖公) 백운(白雲) 우탁(禹倬)의 따님이시다.
조선 왕조(朝鮮王朝) 태종실록(太宗實錄)에 따르면 공께서는 무재(武才)가 있었으며 태종(太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시종(侍從)의 관계로 노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조(太祖) 때에 장군(將軍)으로 군자감(軍資監) 일을 맡아보셨으며 대장군(大將軍) 시절인 1400년(정종2, 庚辰) 정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정안군(靖安君) 방원(芳遠)의 형인 넷째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과 의령군(義寧君) 맹종(孟宗) 부자(父子)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朴苞)와 함께 사병(私兵:家兵)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함)을 일으키자 천명(天命)으로 정안공(靖安公)이 변란을 평정할 때 정성(精誠)을 바쳐 협찬(協贊)하고 오래 조호(調護)를 부지런히 하여 익대좌명(翊戴佐命)한 공훈(功勳)을 세우셨다.
그 후 정안대군(靖安大君)이 정종(定宗)의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의 제3대 왕(太宗)으로 즉위(卽位)하게 되자 1401년(태종 원년, 辛巳) 1월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온(趙溫), 대장군(大將軍) 한규(韓珪) 등 21인과 함께 추충분의 익대좌명공신 4등(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四等)으로 책록되었으며 희천군(熙川君)에 봉(封)해 지셨다.
1406년(태종6, 丙戌) 강계 병마사(江界兵馬使), 이듬해 10월 좌군 총제(左軍摠制), 1408년(태종8, 戊子) 5월 경기 우도(京畿右道) 교동(喬洞) 등처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그 이듬해 10월 평양도 첨절제사(平壤道僉節制使), 1412년(태종12, 壬辰) 1월 개천도감 제조(開川都監提調)같은 해 2월 안주도 병마도절제사(安州道兵馬都節制使)를, 1415년(태종15, 乙未) 12월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 이듬해 10월 문안사(問安使) 등을 거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오르셨고, 훈련관 군자제주(訓鍊觀軍諮祭酒)를 겸하셨다.
1418년(태종 18, 戊戌) 2월 19일 향년 65세를 일기로 별세하시니 상(임금)께서 3일 동안 조회를 받지 않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장사(葬事)를 돌보게 하였으며 양정(襄靖)이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특별히 부조전(不祧典)을 명하시었다.
정배(正配)는 회진군부인 남원양씨(檜津郡夫人南原梁氏)로 집원(集元)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 휘 유지(有智)는 습봉(襲封) 희천군(熙川君)ㆍ병조참판(兵曹參判), 차남 휘 유신(有信)은 운산군수(雲山郡守), 삼남 휘 유석(有晳)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내셨고 따님은 이숙(李俶)의 아내가 되셨다.
묘(墓)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산180-2 서산(西山) 유좌지원(酉坐之原)에 합장(合葬), 곡장산소(曲墻山所)로 모셨다.
사당(祠堂)은 경기도 이천시 이섭대천로1014번길 율현(栗峴, 밤고개) 마을에 있고, 선영 아래 길지(吉地)에 2013년 7월에 준공한 재실(齋室) 희륭재(熙隆齋)가 자리 잡고 있다.
매년 추향제(秋享祭)로 봉행(奉行)하고 있는 도시제(都時祭)의 중심이시다.
※ 군부인(郡夫人):종실(宗室) 종일품(從一品)의 적처(嫡妻)와 공신(功臣), 정일품(正一品)ㆍ종일품(從一) 적처 (嫡妻)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칭하여 군부인 앞에 읍호(邑號)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